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(문단 편집) ==== 중국과의 관계 악화 ====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었지만 흐루쇼프 시절부터 악화되던 [[중소관계]]는 브레즈네프의 집권기에 [[중소결렬|개선되지 못했다]]. 흐루쇼프 실각 직후 소련을 방문한 [[저우언라이]]에게 말리놉스키가 우리가 흐루쇼프를 조졌듯이 당신네도 마오쩌둥을 조져야 한다고 술에 취해서 망언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고, 브레즈네프가 직접 저우언라이에게 사과했음에도 중국은 요지부동이었다. [[마오쩌둥]]은 흐루쇼프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그가 부하들 손에 쫓겨난 것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, [[류사오치]]가 자신에게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우려하기 시작하였다. 1966년 [[문화대혁명]]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계속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난하였다. 1969년에는 중소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[[중국-소련 국경분쟁|무력 충돌과 전면전 위기]]까지 발생하여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고려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났다.[* 당시 정치국에서는 중국의 인적 자원을 극도로 두려워 하였다. 여태껏 소련은 미국과 [[핵전쟁]] 대비만 했지 중국과 같은 인구 대국과의 싸움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. 이 당시 소련에서는 "중국군 500만명이 항복했습니다!"와 같은 유머가 나돌았었다. 또한 소련은 중국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국경으로 밀어넣는 시나리오도 두려워 하였다.] 다행히 양국 지도부의 협상으로 1969년의 위기는 봉합되었으나 중소관계는 특별히 개선되지 못했고 중국은 1970년대에 미국의 손을 잡았다. 1979년에는 중국이 소련을 자극하기 위해 중소분쟁에서 소련 편을 들던 [[중월전쟁|베트남을 침공]]했고,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중국이 소련을 비난하며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게 군사 지원을 하여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. 브레즈네프는 집권 말기인 1980년대 초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중국은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요구하며 브레즈네프의 손을 뿌리쳐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중소관계는 개선되지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